그가 우버에 합류한 2016년, 우버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회사였다.
시작은 단순한 아이디어였다. 2008년 어느 추운 밤, 파리에서 택시를 잡지 못한 두 사람이 떠올린 생각. 버튼을 누르면 차가 온다면 어떨까. 그 한 줄의 발상이 8년 만에 도시의 풍경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그가 입사하던 무렵 우버는 기업가치 680억 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타트업이었다. 500개가 넘는 도시에서 매 순간 차와 사람이 만나고 흩어졌다. 길에 넘쳐나던 자동차들, 빈 좌석들, 멈춰 선 시간들. 그 낭비를 소프트웨어로 빨아들여 도시의 동맥으로 바꾼다는 발상이, 그 시절 실리콘밸리의 가장 빛나는 신화였다.
그 신화의 한가운데에 창업자 트래비스 캘러닉이 있었다. 두려움은 병이고 허슬이 약이라던 사람. 규제가 따라오기 전에 먼저 도시에 들어가 깃발을 꽂고, 용서를 구할지언정 허락은 구하지 않던 사람. 성장 제일주의라는 그 공격적인 문화가 우버를 세계 최강의 스타트업으로 밀어 올렸다. 동시에 그 회사는 2016년 상반기에만 12억 달러가 넘는 돈을 태우고 있었고, 이듬해 한 여성 엔지니어의 폭로로 그 화려한 문화의 그늘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러니까 태훈이 들어선 2016년 봄은, 우버라는 별이 가장 높이 떠올라 빛나던 순간이자, 그 빛에 균열이 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정점이었다.
그는 사용자로서 먼저 우버에 매료된 사람이었다. 차량 공유 서비스를 처음 써보고, 굉장히 혁신적이라고 생각했다. 거리에 넘쳐나는 자동차를 이렇게 영리하게 굴릴 수 있다니. 그리고 곧 그 다음 마음이 따라왔다. 나도 이 혁신을 만드는 데 한몫하고 싶다. 단지 좋은 직장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일의 안쪽에 서보고 싶었다. 오락실 화면 너머의 세계를 동경하던 소년이, 이제 세상을 바꾸는 중이라고 스스로 믿는 회사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가 처음 배정된 곳은 코어 서비스였다. 첫 프로젝트의 내부 이름은 캐스케이드였다.
사용자가 앱을 열었을 때, 어떤 우버 상품을 보여줄지 결정하는 서비스였다. 겉으로는 더없이 단순해 보였다. 화면에 우버엑스, 풀, 블랙 같은 버튼 몇 개를 띄우는 일. 그러나 그 단순한 화면 뒤에는 거대한 미궁이 있었다. 도시마다 규제가 달랐고, 나라마다 허용된 상품이 달랐고, 시간대마다 프로모션이 달랐고, 사용자의 상태마다 보여줄 것이 달랐다. 어떤 도시에서는 합법인 상품이 길 하나 건너에서는 불법이었다. 사용자가 무심코 보는 버튼 몇 개 뒤에서, 수백 개의 정책과 규칙이 실시간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대규모 서비스에서는 기술보다 현실이 더 복잡하다는 것을, 그는 그곳에서 뼈저리게 배웠다. 알고리즘이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세상이 어려운 것이었다. 500개 도시의 서로 다른 법과 관습과 예외를, 하나의 코드 안에 담아내야 했으니까. 부산에서 작은 홈페이지를 만들던 사람이, 이제 지구 절반이 매일 여는 앱의 첫 화면을, 그 화면 뒤의 미궁을 책임지고 있었다.
다행히 그 거대한 회사 안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애런이 그보다 먼저 와 있었다.
컨테이전트에서 비자 동료로 만나, 킥스아이로, 삼성으로, 그리고 우버로. 회사 이름은 계속 바뀌는데 두 사람은 매번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가 곁눈질로 하둡을 배우던 그 어깨가, 가장 큰 무대에서도 여전히 곁에 있었다. 그리고 복도 건너편에는 프로덕트 디자이너 박나용이 앉아 있었다. 둘은 종종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회사 이야기, 한국 이야기, 가족 이야기. 시간이 지나며 가족끼리도 가까워졌고, 공교롭게 아이가 태어나는 시기마저 비슷했다. 거대한 글로벌 기업의 한복판에서, 그는 또 한 번 작은 인연의 그물을 짜고 있었다. 회사가 아무리 커도, 그를 그곳에 머물게 한 것은 결국 복도 건너편의 얼굴들이었다.
기술적으로, 우버에서 그가 본격적으로 익힌 것은 고 언어였다.
당시 우버는 거대한 파이썬 모놀리스를 조금씩 쪼개고 있었다. 다윈 마이그레이션이라 불리던 대수술이었다.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뭉쳐 있던 코드를, 수백 개의 작은 서비스로 분해하는 일. 태훈은 그 덩어리에서 활동 피드 기능, 유피드를 떼어내는 작업을 맡았다. 모놀리식 API를 해체하는 마지막 조각이었다.
고는 처음에 낯설었다. 너무 단순해서, 무언가 빠진 언어처럼 느껴졌다. 다른 언어들이 자랑하는 화려한 기능도, 영리한 기교도 없었다. 그러나 수백 명의 엔지니어가 같은 코드 위에서 일하는 거대한 조직에서, 그 단순함은 곧 강점으로 드러났다. 누가 짜든 비슷하게 읽혔고, 잘난 체할 자리가 없어 오히려 견고했다. 그는 빠르게 고의 팬이 되었고, 그 사랑은 카카오모빌리티와 죽스에서 마이크로서비스를 짤 때까지, 오래도록 이어진다.
여기서 잠깐, 이 책이 처음 문을 연 그 장면을 떠올려야 한다.
그가 우버에 들어오기 위해 통과한 면접이, 바로 555 마켓 스트리트의 그 방이었다. 마지막 라운드는 바 레이저였다. 면접관은 노트북을 잠시 내려다보다 물었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는 무엇입니까. 그 질문 앞에서 답이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실패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원서조차 내지 못한 과학고, 붙고도 가지 못한 외국어고, 천장만 바라보던 등록금 없는 날, 밀린 월급, 홧김에 떠난 다음, 구글에 떨어진 날, 종이상자를 들고 바트를 타던 날. 그러나 그 가장 사적인 실패들은, 면접관이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에 관한 실패를 골랐다.
그가 꺼낸 것은 숨피 시절이었다. 작은 회사에서 자신이 개발자의 역할에만 머물렀던 것. 오너십을 가지고 경영과 라이선스 계약에까지 손을 뻗고, 한국인이라는 강점을 살려 한국을 향한 일에 더 깊이 관여했더라면 결과가 달랐을지 모른다는 것. 자신을 한 사람의 엔지니어로만 한정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그는 말했다.
십수 년 전, 서울의 한 면접실에서 구글의 면접관은 그에게 눈빛이 없다고 했다. 훌륭한 사람의 눈빛이. 그것은 실력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판결이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이제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회사의 면접을 통과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입으로는 일의 실패를 담담히 말하면서도, 그 밑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낮았던 시절들을 부끄러움 없이 안고 있었다. 실패를 가장 많이 가진 자가, 실패를 묻는 질문 앞에서 가장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눈빛이 없다던 그 평결에 대한 그의 조용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