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버의 문화 규율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범지구적으로 만들고, 지역적으로 살아간다. 봉사하는 지역에 깊이 연결되어 있기에, 전 세계를 움직이는 규모와 힘이 나온다는 것.
태훈은 그 문장 앞에서 자주 멈춰 섰다. 나는 지역적으로 살고 있는가. 그가 만드는 것이 범지구적이라는 데는 의심이 없었다. 지구 절반이 쓰는 앱, 수많은 도시의 화물과 운전사. 그러나 여러 팀을 거치며 영향력이 커질수록, 한 가지 질문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지역사회는 어디인가. 8년째 살고 일하고 누리는 이곳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어리어인가. 아니면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처음 일한 한국인가.
답은 그의 일상이 이미 알고 있었다. 미국에 살면서도 그는 늘 한국 뉴스를 봤고, 한국 드라마와 가요를 소비했고, 주로 한국인 친구들을 만났고, 한국 사회를 이야기하며 살았다. 몸은 태평양 이쪽에 있는데, 마음의 시계는 늘 저쪽에 맞춰져 있었다. 곧 돌아갈 줄 알고 가방을 다 풀지 않았던 그 마음이, 8년이 지나도록 어딘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한반도에는 남북 화해의 훈풍이 불고 있었다. 멀리서 그 뉴스를 보며 그는 생각했다. 교류가 늘면 더 많은 이동이 필요해질 것이고, 승차 공유나 배달 같은 일이 한국의 높은 실업률에, 또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양질의 기회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고.
그는 우버가 한국 사업을 본격화하기를 학수고대했다. 한국인으로서 그 일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아, 우버가 한국에서 그것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핵심 사업이 여러 사정으로 좌초된 이래, 우버는 한국에서 좀처럼 두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참여할 여지도 희미했다.
일을 고르는 그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늘 하나였다. 이것이 쓰는 사람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가. 우버에서 그는 많은 이들이 매일 쓰는 제품을 만들었고, 실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 영향의 대상에서, 정작 한국에 사는 가족과 친구와 지인 들은 대부분 빠져 있었다. 그가 평생 만든 것들을,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쓰지 못했다. 가슴 한편의 공허함은 거기서 왔다.
그래서, 그는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때마침 우버는 사상 최대의 기업공개를 앞두고 있었다. 그 해 그의 팀은 의미 있는 성과를 냈고, 그는 승진과 큰 보상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가 떠나겠다는 결정을 일찍 전해 들은 동료는 그에게 대놓고 물었다. 너 미친 것 아니냐. 상장 직전에, 주식 보상이 꽃을 피우기 직전에, 안락한 지중해성 기후와 완벽한 워라밸과 막대한 부를 다 두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그러나 그는 본래 필요 이상의 부나 명예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스무 살까지만 살려던 소년에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덤이었다. 덤으로 사는 인생에 무슨 부귀영화가 그리 절실하겠는가. 안전한 자리에 안주하기보다 어리석을 만큼 과감하게 지르는 것. 마침 그것은 우버의 규율이기도 했다. 우리는 대담하게 지른다. 그는 그 규율을 회사를 떠나는 일에 그대로 적용했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무대를 자신이 믿는 지역으로 옮기는 것일 뿐이라고.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내리던 순간을, 그는 오래 기억한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바퀴가 활주로에 닿고, 창밖으로 익숙한 한글 간판들이 스쳐 지나갈 때. 8년 만이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오자 한국어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미국에서도 늘 한국어를 쓰고 살았지만, 공기 전체가 모국어로 가득 찬 느낌은 또 달랐다. 안내 방송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통화도, 카페 점원의 인사도 전부 한국어였다. 알아듣기 위해 반 박자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 사소한 이완이, 그에게는 묘한 안도였다. 옐프에서 진짜 외국인이 되어 농담의 타이밍을 놓치던 사람이, 이제 모든 농담을 한 박자도 놓치지 않는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공항을 나서자 11월의 한국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베이에어리어의 건조하고 온화한 바람과는 다른, 습기와 매연과 음식 냄새가 섞인 도시의 공기. 누군가에게는 그저 텁텁한 공기였겠지만, 그에게는 고향의 냄새였다. 평생 마산에서, 가리봉동에서, 부산에서, 서울에서, 제주에서 떠돌던 그 모든 도시의 공기가 거기 다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항구에서 항구로 날던 갈매기가, 8년의 대양 횡단 끝에 처음 출발했던 그 항구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랜 표류 끝에 고향 기슭에 닿은 「오디세이아」의 사내가 그러했듯, 돌아온 자는 떠난 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일하게 된 곳은 카카오모빌리티였다. 무대는 판교였다.
판교라는 이름은 그에게 각별했다. 네이버 시절 부동산 서비스를 만지며 처음 그 신도시를 알았고, 내 집을 갖고 싶어 청약을 넣었다가 떨어졌던 바로 그곳. 십수 년 전 화면 속 데이터로만 보던 그 도시에, 이제 그는 출근하는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서판교에 세를 얻어 자리를 잡았다. 청약에 떨어졌던 도시에, 기어이 다시 발을 들인 것이다. 안 되면 돌아가는 사람. 판교에 관해서만큼은 그는 늘 그랬다.
판교의 아침은 풍경부터 낯설고도 익숙했다. 판교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의 물결. 사원증을 목에 건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이, 테크노밸리의 유리 건물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흩어졌다.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 귀에는 이어폰, 눈은 휴대폰. 그 분주한 물결 속에 그도 섞여 들었다. 테헤란밸리에서 처음 기술 산업에 발을 들였던 사람, 실리콘밸리의 555 마켓 스트리트를 제집처럼 오가던 사람이, 이제 판교 테크노밸리의 인파 속 한 사람이 되어 걷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풍경의 바깥에서 8년을 살았는데, 다시 그 안으로 걸어 들어오니 마치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영영 이방인일 것 같기도 했다. 두 세계를 다 가진 사람의, 그래서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사람의 아침이었다.
카카오모빌리티는 그가 합류하기 직전, 큰 투자를 받아 독립 회사로 출범한 참이었다. 카카오T라는 앱으로 이미 2500만에 가까운 회원을 모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택시를 부를 때 여는 그 앱의 회사였다.
규모가 주는 무게는 우버 못지않았다. 그가 손대는 기능 하나가 2200만 명이 넘는 사용자의 이동에 닿았다. 그는 테크 리드로서 여러 핵심 마이크로서비스를 설계하고 구현했다. 인증, 기사, 배차, 경로, 정산. 우버에서 사랑하게 된 고 언어와 gRPC, 카프카, 레디스를 한국의 서비스 위에 펼쳤다. 그가 만든 사전 확정 요금은, 택시를 타기 전에 요금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미터기가 올라가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승객의 오랜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일이었다. 그가 제안한 새 디스패치 플랫폼은, 우버에서 익힌 H3 기술을 빌려 기존보다 열 배 빠르고 한결 단순한 구조를 그렸다.
그러나 이번 일에는, 우버 시절에 없던 한 가지가 있었다. 그가 만든 것을, 그의 가족과 친구와 지인이 실제로 쓴다는 것. 어머니를 잃고 홀로 슬퍼하던 그를 평일에도 찾아와 준 부산의 친구들이, 그가 만든 택시 호출 앱으로 차를 불렀다. 아내가, 옛 동료가, 길에서 스치는 이름 모를 한국 사람들이 그의 코드 위에서 움직였다. 우버에서 가슴 한편에 있던 그 공허함이, 비로소 채워지고 있었다. 범지구적으로 만들던 사람이, 마침내 자기 지역에서 살며 만드는 사람이 된 것이다.
2019년, 그는 카카오의 개발자 컨퍼런스 이프카카오 무대에 섰다. 고와 gRPC로 만드는 실용적인 마이크로서비스를 주제로 한 발표였다. 2006년 네이버의 작은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다소 부끄러운 결론을 내리며 발표하던 그 청년이, 13년 뒤 한국 최대 IT 기업 중 하나의 무대에서, 실리콘밸리에서 단련한 기술을 한국의 후배 개발자들에게 풀어놓고 있었다. 떠났던 자가 돌아와, 자신이 건너편 대양에서 배운 것을 고향의 사람들에게 나누는 자리. 그것은 「귀향」이라는 그의 결심이 가장 선명한 모양으로 실현된 장면이었다.
이 시절, 그는 또 한 사람의 좋은 인연을 만난다. 카카오모빌리티의 기술 책임자였던 조시였다. 조시는 기술 이야기뿐 아니라 삶과 커리어에 대한 고민까지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상사였다. 한국에 돌아와 어딘가 겉돌던 그에게, 직급을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작지 않은 위안이었다. 회사가 아니라 사람을 믿어온 그의 곁에, 또 하나의 믿을 만한 얼굴이 더해진 셈이었다. 그리고 이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가 인생의 또 다른 갈림길 앞에 설 때, 조시는 결정을 대신 내려주는 대신 묵묵히 그의 등을 밀어주는 중요한 조언자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몇 해 뒤의 이야기다.
그러나 솔직히 적어두자면, 카카오모빌리티에서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년 남짓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즐거웠다. 실리콘밸리에서 익힌 방식을 실제 서비스에 적용했고, 수천만 명이 쓰는 제품을 직접 개선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그는 기술과는 다른 종류의 문제와 마주했다. 어떤 선택이 옳은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런 질문들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엔지니어를 기술로 문제를 푸는 사람이라 여긴다. 그러나 경력이 쌓일수록 그는 알았다. 더 어려운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가치관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 무렵, 바로 그런 순간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고, 조직은 조직의 논리를 설명했다. 그러나 끝내 두 사람은 같은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가 믿는 기준과 조직이 택한 방향이 달랐을 뿐이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재미있는 문제를 좇아 살아왔지만, 그보다 먼저 지키고 싶은 기준이 있었고, 그 기준만큼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 피멍이 든 허벅지로 끝까지 깜지를 거부하던 그 소년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납득되지 않는 것에는 끝내 손을 놓는 사람. 두 세계를 다 가진 사람은 두 세계 사이의 간극도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법이고, 그는 다시 어딘가 맞지 않는다는 감각과 마주했다.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그렇다고 이 귀향이 실패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국과 실리콘밸리는 정말 다른가, 그 사이의 사람은 어디에 속하는가. 그는 「귀향」에서 던진 그 물음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통과하고 있었다. 그는 곧 다시 짐을 쌌다. 실리콘밸리로 돌아가되, 목적지를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 돌아갈 곳은 있었지만, 돌아가고 싶은 곳은 아직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그는 다시,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여행을 시작한다. 자율주행이라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가장 미래적인 물을 향해. 그러나 이번의 떠남은 도망이 아니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이제 어렴풋이 알았고, 판교는 조용히 그를 기다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