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시작을 이야기하려면 그가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가 있다.
태훈의 핏줄에는 두 개의 항구가 흐른다. 마산과 부산. 어머니 쪽이 마산이었고, 아버지 쪽이 부산이었다. 그가 마산에서 태어난 것은 어머니의 땅에서 태어났다는 뜻이고, 청소년이 되어 부산으로 내려간 것은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사람의 생애가 때로 지도 위에 미리 그어진 선을 따라 흐른다면, 그의 선은 두 항구 사이를 잇는 짧고 팽팽한 실이었다.
외가 쪽 이야기는 그늘이 깊다.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마산의 순사였다. 그 시절 순사라는 자리가 어떤 무게를 지녔는지, 어린 태훈이 헤아릴 수 있었을 리 없다. 다만 그는 외할아버지를 아주 어릴 적 한두 번 본 것이 전부였고, 정이라 부를 만한 것은 끝내 생기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에게는 부인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는 배다른 남매들이 있었다. 한 사람의 가계도라기보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강의 지류처럼 얽힌 내력이었고, 그 얽힘 속에서 어머니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사람으로 자랐을 것이다. 어머니의 평생을 따라다닌 어떤 불안의 뿌리가 거기 있었다고, 태훈은 한참 뒤에야 어렴풋이 짐작했다.
친가 쪽은 그보다 한결 온기가 돈다. 친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남아 있는 흐릿한 감촉만은 외가 쪽보다 편안했다. 아버지는 부산 사람이었고, 인쇄업으로 밥을 벌었다. 학교는 중학교에서 멈췄다.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버지는 공부를 잘했지만 형편이 진학을 허락하지 않았고,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을 접은 채 활자와 잉크의 세계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국민학교를 마친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그 시절, 그 형편의 여자아이가 국민학교라도 마쳤다는 것은 외려 예외에 가까운 일이었다.
태훈은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전까지, 아버지가 부산 동아대학교를 나온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어린 그의 내면에 오래 남았다. 아이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안다고 믿었지만, 그 앎의 절반은 사실 이야기였다.
1979년 4월, 그 두 핏줄이 만난 자리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마산이었다.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맡은 냄새가 무엇이었는지 그는 알지 못하지만, 짐작은 한다. 잉크 냄새였을 것이다. 갓 찍어낸 종이에서 풍기던, 비릿하면서도 어딘가 따뜻하던 그 냄새. 아버지의 손끝에는 늘 그것이 배어 있었다. 활자를 다루는 사람의 냄새, 종이를 다루는 사람의 냄새. 그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첫 냄새가 하나의 예언이었음을 알았다. 그는 평생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게 되고, 그가 만들 것은 활자가 아니라 코드였지만, 결국 둘 다 빈 면 위에 의미를 새겨 넣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마산에서의 시절은 길지 않았다. 다섯 살이 되던 1984년,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다. 더 나은 살림을 찾아서가 아니라, 그저 살림이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처음 닿은 곳은 구로동. 얼마 지나지 않아 옆 동네로 옮겼다. 구로공단의 심장인 가리봉동이었다.
가리봉을 모르는 사람에게 1980년대의 그 동네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곳은 그 시절 대한민국이 가장 빠르게 달리던 자리였다. 공단의 공장들이 밤낮없이 연기를 뿜어냈고, 전국에서 올라온 젊은 노동자들이 좁은 골목마다 빼곡히 들어찼다.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집을 벌집이라 불렀다. 한 채의 건물을 잘게 쪼개어 수십 개의 방을 들인, 정말로 벌집을 닮은 셋집. 부엌도 화장실도 여럿이 나누어 썼고, 방 한 칸이 한 가족의 살림 전부였다. 그 단칸방이 아이의 첫 무대였다.
그리고 그 공단의 수많은 여공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아이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는 아니었다. 살림이 워낙 어려웠던 탓에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공장에 나가야 했다. 범한정기라는 회사였다고 그는 기억한다. 시계를 만드는 곳이었다. 1980년대의 한국은 스위스,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시계 강국이었고, 구로공단의 좁은 작업대마다 여공들이 머리를 숙인 채 손톱만 한 부품을 핀셋으로 집어 들이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도 그 작업대 가운데 하나에 앉아, 하루 종일 시간을 조립했다.
어머니는 공장에서 시간을 만들었다. 남의 손목에 채워질 시간을, 정확하고 어김없는 시간을 매일같이 조립해 세상으로 내보냈다. 집에서는 벽시계 초침 소리만 오래 남았다. 어머니가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아이는 어두운 방에서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가난은 아이에게 추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만질 수 있는 사물의 형태로 곁에 있었다. 붉은 압류 딱지가 그랬다. 돈 될 것 하나 없는 셋방 세간에도 그 딱지는 몇 번이고 붙었다 떨어졌다. 텔레비전에, 밥상에, 옷장 문짝에 붙은 그 종잇조각을 그는 몇 번이나 보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붉은 딱지는 때로 물건보다 먼저 마음을 건드렸다. 빼앗아갈 것조차 없다는 사실을 붉은 도장으로 증명해 보였다. 외상도 그랬다. 구멍가게에서 외상으로 먹거리를 가져오다 제때 갚지 못한다고 주인아주머니에게 혼이 나거나 손찌검을 당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굶주림도 그랬다. 어떤 날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며칠씩 들어오지 않아, 아이는 하염없이 굶었다. 그래서 그는 일찍 생존을 배웠다. 어린 티를 채 벗기도 전에 빈 병을 주워 고물상에 넘겼고, 신문을 돌렸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었다. 굶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익힌 기술이었다.
그런데 이 가난한 방에는, 가난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하나둘 늘어갔다.
종이였다. 상장이라는 이름의 종이.
1986년 서울 두산국민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이상하게도 학교에서만은 빛났다. 개교 기념 그리기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아 왔고, 산수 경시대회에서는 금상을 탔다. 손에 쥐어진 종이 한 장, 상장이었다. 우수상이 잇따랐고, 한자쓰기 대회에서 은상을, 자연관찰 탐구 대회에서, 방학 과제 전시회에서 거푸 상장을 받아 왔다. 숫자 앞에서 그의 머리는 유난히 맑게 트였다. 셈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놀이였다. 답이 정해져 있고,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린다. 집 안의 어떤 것도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기에, 아이는 분명한 것 앞에서 비로소 안도했다.
그런데 같은 교실에 그를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가 되는 김정은이다. 두 사람은 두산국민학교 동창이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아내가 들려준 어린 태훈의 모습은 상장 속 우등생과는 딴판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 그는 문제아 그 자체였다. 과학 실험 시간에 기어이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교실에 불이 날 뻔했고, 그 바람에 반 전체가 단체로 기합과 체벌을 받았다. 하도 말을 안 들어, 벌로 책상이 교실 앞에 돌려 놓여 꽤 오랜 기간 동안 아이들과 마주 보고 앉아야 했던 적도 있다. 숙제는 한 번도 해 온 적이 없었다. 해마다 새 공책을 사기는 했지만 두 장 넘게 써 본 적이 없었고, 방학 숙제라는 것도 해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니 같은 반 여자아이의 눈에 비친 그는, 결코 좋게 기억될 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같은 아이가, 누군가에게는 상장을 쓸어 오는 우등생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교실에 불을 낼 뻔한 문제아였다. 둘 다 그였다. 숫자 앞에서는 맑게 트이면서도, 시키는 일은 도무지 하지 못하는 아이. 자기가 납득한 것에는 빛나면서도, 납득되지 않는 것 앞에서는 끝까지 손을 놓아 버리는 아이. 그 모순은 평생 그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 문제아를 가장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동창은, 그 누구보다 그를 깊이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이 된다.
여기 한 장면이 있다. 한 사람의 유년 전체가 담긴 장면이다. 같은 방, 같은 빛 속에 두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세간에 붙은 붉은 압류 딱지였고, 다른 하나는 아이가 받아 온 산수 상장이었다. 빼앗김을 알리는 종이와 해냄을 증명하는 종이가, 한 평 남짓한 방바닥에서 나란히 빛바래 갔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아이의 세계는 온통 종이로 지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공장에서 종이를 찍었다. 어머니가 일하던 시계는 정밀했지만, 집으로 날아드는 것은 늘 종이 고지서였다. 아이가 받아 오는 영광도 종이였고, 그 영광을 짓누르는 빚의 표식도 종이였다. 그리고 아이는, 살 수 없는 것들을 종이 위에 직접 지어내기 시작했다.
부루마불과 인생게임이 또래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 주사위를 굴려 땅을 사고 돈을 불리는 그 화려한 상자들은 그에게 살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 집에서 어깨너머로 본 게임을 머릿속에 담아 와, 종이 위에 옮겨 그렸다. 칸을 그리고, 규칙을 정하고, 없는 그림은 상상으로 채웠다. 희한하게도 아이들은 가게에서 산 게임보다 그가 그린 게임을 더 좋아해 주었다. 신이 난 그는 매일 자기만의 규칙을 한 줄씩 더 보탰다. 세상에 없던 규칙을 만들고, 빈칸을 제 상상으로 메우는 일. 그것이 그의 직업이 될 줄을, 종이에 칸을 긋던 아이는 알지 못했다.
피아노 소리를 좋아했지만 피아노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흔히 구할 수 있던 종이 건반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소리 없는 연주를 연습했다. 손가락이 종이를 누를 때마다 머릿속에서만 울리던 음들. 그 무렵 그는 임마누엘교회에 다녔고, 여름이면 성경학교에 갔으며, 초등부 과정을 끝까지 마쳤다. 어느 날 교회에서 그 소리 없는 손놀림을 본 성가대의 형과 누나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기억이, 오래도록 그의 안에 따뜻한 불씨로 남았다. 가난한 아이에게 칭찬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양식이었기에, 그 몇 마디는 몇 해를 버틸 힘이 되었다.
가질 수 없었기에 상상해야 했고, 상상했기에 만들 수 있었다. 그는 가난을 창의성의 원천이라 적게 된다. 돈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사면 그만이라 상상할 여지가 적지만,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아이에게는 머릿속과 종이 한 장이 세계의 전부였다. 결핍이 빚은 손. 그 손이 어떤 화면 앞에서 마침내 불을 뿜게 될지,
유년의 풍경이 온통 잿빛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1987년, 신문사에서 재판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은 잠시 청주로 옮겨갔다. 아이는 그곳 청주 한벌국민학교에 전학했다. 서울 공단 골목의 빽빽함과는 사뭇 다른, 한결 느슨하고 한적한 지방 도시의 공기가 거기 있었다. 전학 가자마자부터 재차 성적 우수상을 받았다. 잠깐이지만 셈이 맑은 아이는 그 작은 도시에서 제법 빛났다.
그 무렵 그의 집은 오락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낮이고 밤이고 벽 너머에서 전자음이 새어 들어왔고, 아이는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랐다. 오락실을 지키던 아주머니는 곁집의 그 아이를 귀여워했는지, 동전이 없는 그에게 자주 게임을 그냥 시켜주었다. 거저 얻은 그 시간 속에서 아이는 화면 너머의 작은 세계로 자꾸만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원더보이 2를 동네에서 처음으로 동전 하나에 끝까지 깼다. 한 번도 죽지 않고 엔딩까지 간다는 것은 그 무렵 그 동네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마지막 관문을 넘어설 즈음, 그의 등 뒤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화면을 들여다보던 어른들과 또래들의 눈이 처음으로 그를 향했다. 평소 어디서도 그리 눈에 띄지 않던 아이가, 그 작고 시끄러운 가게 안에서 잠깐 동네의 영웅이 되었다. 무언가를 남보다 잘해서 누군가의 눈길을 받는 일. 가진 것 없는 아이에게 그것은 처음 맛보는 종류의 기쁨이었다. 그 작은 화면이 자신을 어디까지 데려갈지, 동전 하나로 세계 하나를 끝까지 건넌 아이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 짧은 청주 시절이 한 사람의 인생에 남긴 것은 그 화면 앞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같은 학교를 거쳐 간 또 한 사람, 다섯 살 위의 임창하라는 사내가 있었던 것이다.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뒤 태평양 건너의 한 회사에서, 두 사람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 하나로 단숨에 가까워지게 된다. 인연이란 종종 그렇게, 의미를 알아채기 한참 전에 먼저 씨앗으로 심긴다. 청주의 운동장을 달리던 아이는 그 씨앗을 알 길이 없었다.
1988년, 가족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아이는 두산국민학교로 되돌아갔다. 학적부에는 또 한 줄의 전학 기록이 더해졌다. 어린 그에게 정착이라는 말은 늘 잠시 빌려 쓰는 단어 같았다. 짐을 풀기도 전에 다시 쌀 준비를 하는 삶. 그는 어디에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고, 그래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것이 상처인지 능력인지는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입학 때부터 해마다, 그의 성적표 한구석에는 같은 문장이 따라붙었다.
눈물이 많다.
선생의 그 짧은 평은 정확했다. 그는 자주 울었다. 슬픈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부모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었고, 장난기와 호기심이 많던 그는 끊임없이 사고를 쳐 매일같이 혼이 났다. 갖고 싶은 장난감은 가질 수 없었고, 보고 싶은 만화영화는 볼 수 없었다. 안에서부터 억울함이 가득 차오른 채로 학교에 가서 또 꾸중을 들으면, 눈물은 어김없이 터졌다.
집에서의 벌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 시절 여느 이웃집이 그러했듯, 아버지의 훈육에는 매가 따랐다.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각목에는 교육봉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아이는 자주 멍이 든 채로 잠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를 가장 서럽게 한 것은 매의 아픔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댈 곳인 사람에게 맞는다는 사실, 그 외로움이었다. 옷이 벗겨진 채 집 밖에서 벌을 서다 마침 지나가던 학교 친구들과 눈이 마주쳤던 어느 날의 부끄러움을,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못했다.
그 시절의 그는 자주 흔들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마다 몸을 작게 접었고, 누가 이름을 부르면 먼저 어깨가 굳었다. 그래도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책가방을 메고 비탈을 내려갔다. 강함은 거창한 결심보다 그런 반복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꾸만 사라지는 어머니가 있었다.
시간을 조립하던 어머니는, 정작 집에서는 자주 사라졌다. 처음에는 며칠, 다음에는 한두 달. 다투고 난 뒤면 어머니는 길게 돌아오지 않았다. 가난이 어머니를 공장으로 밀어냈고, 그 고단함과 부부의 불화가 다시 어머니를 집 밖으로 밀어냈다. 누구를 탓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 어른이 된 태훈도 쉽게 답하지 못한다. 다만 그 부재의 자리에 남겨진 것은 늘 어린아이였다.
어머니가 없을 때면 아이는 끼니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는 냄비에 밥을 안치는 법을 배웠다. 쌀을 씻고, 손등으로 물을 맞추고, 불을 올리는 그 단순한 동작이, 어린 그에게는 부재를 견디는 의식이 되었다. 누군가 차려주는 밥상을 기다리는 대신, 그는 제 손으로 제 한 끼를 지었다. 그렇게 지은 밥은 자주 설거나 탔지만, 그래도 그것은 그가 자신을 먹여 살린 최초의 밥이었다.
3학년 무렵의 어느 날에는, 낯선 아주머니가 새엄마라며 집에 있기도 했다. 그것이 아이는 너무도 싫었다. 어린 마음에 그 낯선 존재는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으러 온 사람이었고, 어머니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예고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 아주머니가 언제 어떻게 집을 떠났는지는 기억에 흐릿하다. 다만 싫었다는 감정만이, 또렷한 흉터처럼 남았다.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 가운데 하나는, 텔레비전 앞에 나란히 앉아 있던 저녁이다. 그 무렵 온 나라가 한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대발이라는 사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랑이 뭐길래」. 저녁이면 골목의 모든 창에서 같은 대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그 드라마를 좋아했고, 아이는 어머니 곁에 바싹 붙어 앉아 함께 보았다. 그 시간이, 가난도 매도 잠시 멈추던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한때였다. 어머니의 옆얼굴, 텔레비전의 푸른 불빛,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짧은 침묵. 아이는 그 침묵이 좋았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아이는 드라마를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볼 수 없었다. 대발이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그는 끝내 알지 못한다. 어머니와 함께 보던 드라마였기에, 어머니 없이 그 결말을 마주하는 일은 그에게 가능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끝을 알면서도 끝까지 볼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에게는 그 드라마가 그랬고, 어머니라는 사람 자체가 그랬다.
1992년 2월, 그는 두산국민학교를 졸업했다. 6년 동안 받아 온 종이 상장이 제법 두툼했다. 그해 3월, 서울 영서중학교에 입학했다. 교복이 어색했고, 봄볕은 짧았다.
그러나 그 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집안을 끝내 무너뜨린 것은, 공교롭게도 한 장의 종이였다. 정확히는, 종이에 적힌 거짓말이었다.
아버지는 한때 동아출판사에 몸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학력이 적어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력서의 대졸이 실은 중졸이었던 것이다. 학력 위조. 그 한마디로 아버지는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 뒤 종로에 인쇄 필름 사업을 차려 다시 일어서 보려 했지만, 사업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학력을 속였다는 꼬리표가 붙은 사람을 서울의 어느 직장도 다시 받아주지 않았다. 평생 종이와 활자를 만지며 살아온 사람이, 종이 한 장의 거짓말 때문에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아이는 그 사정을 알지 못했다. 여전히 아버지를 동아대학교를 나온 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한 거짓말이 가족의 지붕을 통째로 내려앉히는 동안에도, 아이는 그 거짓말의 폐허 위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가 그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기까지는 아직 두 해가 더 남아 있었다.
갈 곳을 잃은 아버지가 방향을 튼 것은 고향 부산이었다. 그러나 집을 얻을 돈조차 없었다. 그래서 향한 곳이,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최재남의 집이었다. 부산 남부민동 달동네 비탈에 붙어 있던 작은 집의 셋방. 그 무렵 어머니의 부재 역시 이제 일시적인 가출이 아니라 영영의 일처럼 굳어 있었다. 시간을 조립하던 어머니는 끝내 가족의 시간 밖으로 걸어 나갔고, 남은 것은 아버지와 두 형제뿐이었다. 어머니의 땅 마산에서 태어난 아이가, 이제 아버지의 땅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떠나기 전, 아이는 갑자기 정든 동네를 떠난다는 것이 너무 서러워 정처 없이 골목을 배회했다. 그러다 6학년 때 같은 반이던 박정은과 장미영을 오랜만에 마주쳤다. 작별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짧은 인사를 건넸다. 나, 이사 가. 그러나 두 사람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뿐이었다. 아이에게는 한 세계가 끝나는 일이었지만, 친구들에게는 스쳐 가는 한마디였을 뿐이다. 이별의 무게가 양쪽에서 같은 적은 드물다는 것을, 아이는 그날 골목에서 처음으로 어렴풋이 배웠다. 가장 서러운 작별은, 나만 서러운 작별이다.
이사를 위해 용달 트럭이 왔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 밴 살림들, 빛바랜 이불과 이가 나간 그릇과 압류 딱지가 붙었다 떨어진 자국이 선명한 세간을 짐칸에 가득 싣고, 트럭은 오래도록 남쪽을 향해 달렸다. 도로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아이는 흔들리는 짐칸의 살림들 틈에서, 혹은 비좁은 운전석 한구석에서, 점점 멀어지는 서울과 점점 가까워지는 알 수 없는 도시 사이의 그 긴 시간을 견뎠다. 무언가가 끝나고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열세 살의 그는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다만 그 새로운 도시가 자기 생에서 가장 어두운 터널이 되리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바다가 보이는 산동네, 남부민동. 화장실에 가려면 남의 마당을 지나야 하는 집, 곰팡이 핀 창틀과 이끼 낀 다라이, 그리고 끝내 가지 못할 학교 하나가, 그 비탈 위에서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갈매기의 항로는, 그 항구에서 비로소 첫 날갯짓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