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을 떠난 그는 백수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감만은 하늘을 찔렀다. 한국 최고의 회사에서 주요 서비스의 주축이 되어 본 경험이, 그를 더 먼 곳으로 떠밀었다. 그 더 먼 곳의 이름은 구글이었다.
2000년대 중반의 구글은 전설이 되어가던 회사였다. 2004년 상장 이후 구글은 실리콘밸리 그 자체의 상징이 되었고, 지메일과 맵스와 어스는 인터넷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해마다 새로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의 개발자들에게도 구글은 하나의 신화였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가는 회사, 세상에서 가장 좋은 코드가 쓰이는 곳. 태평양 건너의 그 이름은, 부산 달동네에서 자란 한 청년에게는 거의 다른 행성의 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행성이, 마침 한국에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신화의 문을 두드렸다.
면접관 이준영은 검색 결과 화면에서 검색어를 강조하는 기능을 어떻게 구현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규식을 쓰면 된다고 답했다. 스스로는 제법 괜찮은 답이라 여겼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그 면접관을 한 행사에서 다시 만나 물었다. 왜 자신을 떨어뜨렸느냐고. 돌아온 답은 그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 훌륭한 사람은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때의 당신에게는 그런 눈빛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눈빛. 그것은 기술에 대한 평가가 아니었다. 답이 틀렸다는 말이었다면 차라리 견디기 쉬웠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코드가 아니라 그의 존재에 대한 판결처럼 들렸다. 서울대나 카이스트가 아니면 안 된다던 말, 흙수저는 흙수저일 뿐이라던 눈초리, 너는 더 나은 무언가가 될 수 없는 아이라던 열네 살의 의심. 그가 평생 들어온 그 말의 가장 세련된 판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평결에 동의하지 않았다. 눈빛이 없다면, 눈빛 없이도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그때 그는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십수 년 뒤, 자신이 그 면접관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빛을 들여다보게 되리라는 것을.
당장은, 그러나, 생계가 막막했다. 그리고 구글에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가장 큰 물이 그를 불렀다. 다음과 함께 한국 인터넷을 양분하던 NHN. 2000년 검색 포털 네이버와 게임 포털 한게임이 합병해 출범한 회사로, 그가 몸담던 시절에는 NHN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네이버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그가 입사를 타진하던 2000년대 중반, 네이버는 이미 압도적인 1위였다. 검색 시장 점유율은 70퍼센트에 육박했고, 한게임의 웹보드게임이 든든한 캐시카우 노릇을 하며 회사는 해마다 몸집을 불렸다. 다음에서 일하던 시절 그는 늘 네이버를 2등이라 여겼는데, 막상 면접을 보러 간 역삼동 스타타워의 화려함은 다음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 거대한 사무실 앞에서, 그는 또 한 번 압도되었다.
그러나 입성은 매끄럽지 않았다. 처음 받은 제안은 제니스라는 인력 회사 소속의 계약직이었다. 얼마 전 별생각 없이 온라인 취업사이트에 이력서를 넣은 것이 그렇게 연결된 것이었다. 계약직으로 일할 생각이 없던 그는, 미리 일러주지 않은 담당자를 탓하며 문을 박차고 나왔다.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자존심은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다. 얼마 뒤 공채에서도 떨어지고 막막해질 무렵, 이번에는 NHN이 직접 단기 계약직을 제안해 왔다. 기간은 6개월. 그는 그 기간 동안 적당히 일하며 구글에 다시 도전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가장 큰 물에, 그는 또 한 번 가장 낮은 자리로 들어섰다.
첫 출근 날, 그를 인계받은 콘텐츠서비스 개발팀의 전욱표 팀장은 사무실을 구경시켜 주며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다음이라는 큰 회사에서 왔다고 자만하지 말 것. 계약직이니 주어진 기간 동안 시킨 일만 할 것. 그리고 네이버는 서울대나 카이스트 출신이 아니면 대우받지 못하니 욕심내지 말 것. 공고를 나온 그의 자존심에 옅은 생채기가 났다. 그러나 어차피 계약 기간 이상 머물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는 크게 담아두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이 시절의 그를 떠올릴 때, 그는 종종 한 가지 사소한 행운을 웃으며 이야기한다. 구름다리에 관한 이야기다.
제주에서 올라온 그는 분당 정자동의 신축 오피스텔 인텔리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분당선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사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 NHN 전체 조직이 이사를 했다. 새 건물은 분당 정자동의 SK C&C 타워. 공교롭게도 그가 사는 인텔리지와 구름다리로 연결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덕분에 기상에서 출근까지 빠르면 5분 안에 끝났다. 잠에서 깨어 구름다리를 건너면 곧 사무실이었다. 땅을 한 번도 디디지 않고, 건물 밖으로 한 발도 나가지 않고 하루를 보낸 날이 많았다. 야근을 한 날이면 잠깐 집에 건너가 낮잠을 자고 다시 건너오기도 했다. 평생 차비가 없어 편도 다섯 시간을 걸어 학교에 가던 소년, 등록금이 없는 절망과 차비가 없는 절망의 차이를 몸으로 알던 청년이, 이제는 땅을 밟지 않고 출근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거리란 결국 주머니 사정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구름다리 너머 1분 거리의 직장은 작지만 분명한 사치였다. 그는 그 사치를, 오래 누리지는 못할지언정, 마음껏 즐겼다.
네이버에서 그가 맡은 일은 부동산 서비스였다.
처음에는 게시판을 개선하는 일이었다. 당시 네이버는 PHP로 만들어져 있었고, 코드는 생각보다 조악했다. 그는 동갑내기 동료 고희경의 도움과, 애드뱅크에서 PHP를 다뤄본 경험을 발판 삼아 코드를 파악해 나갔다. 그리고 다음에서 배운 MVC 구조를 이 일에 적용해 보고 싶어, 모자비라는 PHP 프레임워크를 끌어들였다. 계약직이 생소한 기술을 들고 와 일을 벌인다는 소문이 팀 안에 퍼졌고, 스타 개발자와 윗선의 귀에까지 들어가 우려 반 기대 반의 반응을 얻었다. 시킨 일만 하라던 충고를, 그는 또 듣지 못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러나 부동산이라는 일은 그에게 단순한 업무 이상이었다. 매일 화면 위에서 전국의 집을 들여다보는 일. 평수와 시세와 매물이 데이터로 흘러 다녔고, 그중에서도 그의 눈을 자주 붙든 곳이 있었다. 판교였다.
그 무렵 판교는 아직 도시가 아니었다. 성남 남쪽, 청계산 자락에 논밭과 비닐하우스가 펼쳐진 그 땅 위에, 나라가 새 신도시를 통째로 그려 넣고 있었다. 그는 업무로 그 계획을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분양 공고와 단지 배치도, 조감도와 청약 일정. 화면 속에서 맨 땅 위로 한 도시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는, 그가 평생 살아온 어떤 동네와도 닮지 않았다.
조감도 속 판교는 빽빽하지 않았다. 건물 사이로 녹지가 넉넉했고, 단지마다 공원이 안겼고, 청계산에서 흘러내린 운중천이 동네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산과 물과 집이 한 폭에 어우러진 그림이었다. 게다가 그곳은 강남이 지척이었다. 새로 놓일 전철이 테헤란로까지 한달음에 닿을 예정이었고, 무엇보다 판교의 한쪽에는 테크노밸리라는 이름의 거대한 기술 단지가 함께 들어설 참이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표방하는 도시. 그러니까 그것은,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맨 땅에서부터 새로 짓는 도시였다. 자기 같은 사람이 살라고 누군가 처음부터 설계한 동네가, 세상에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풍경 앞에서, 직업적 관심은 어느새 사적인 열망으로 번졌다. 그곳에 내 집을 갖고 싶다. 집을 보여주는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이, 정작 자기 집 한 칸이 없었다. 곰팡이 핀 창틀도, 이끼 낀 다라이도, 남의 마당을 가로질러야 닿던 화장실도 없는 곳. 산이 보이고 물이 흐르는, 자기 같은 사람을 위해 지어진 그 깨끗하고 환한 도시의 한 칸. 그것은 그에게 부동산이 아니라, 평생 떠돌기만 한 사람이 마침내 땅에 닻을 내리겠다는 오래된 소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외고에 떨어지던 날 이후로 좀처럼 그려본 적 없던 자신의 미래를, 그는 그 조감도 위에서 처음으로 다시 그려보고 있었다. 저 깨끗한 도시의 한 집에 사는 나.
그는 청약을 넣었다. 대광로제비앙 32평형이었다. 결과는 낙첨이었다. 매일 판교의 집들을 화면에 띄우면서도, 그 화면 속 어느 한 칸도 아직 그의 것이 되지 못했다. 보통의 일이었다면 그는 안 되면 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판교만은 달랐다. 청약에 떨어진 그날,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이 도시와 평생에 걸친 인연을 맺게 되리라는 것을. 떨어뜨린 도시에 끝내 다시 돌아오고, 또 돌아오기를 거듭한 끝에, 그 도시가 결국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할 그의 긴 항로의 마지막 항구가 되리라는 것을.
계약직의 6개월은 그저 흘려보낼 시간이 아니었다.
대충 주어진 일만 하다 구글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시작하니 그럴 수 없었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인데 부끄럽지 않게 하자는 마음이 앞섰고, 그러다 보니 다른 준비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오래 머물면 결국 진심으로 몰두하게 되는 사람. 그 팀의 절반가량이 외주거나 계약직이었고, 정규직 전환의 기회는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채용 과정을 거치는 일이었지만, 그는 그 관문을 통과했다. 2006년 말, 그는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그가 그 팀에 있는 동안 계약직에서 정규직이 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이미 팀의 안쪽에서 인사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그는 유리한 고지에서 처우를 협상했고, 대리 말년의 직급과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아냈다. 얼마 뒤에는 과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NHN 최연소 과장이라는 말도 들었다. 일정 기간만 채우면 되는 자리라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지만, 시킨 일만 하라던 충고가 무색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무렵 그는 또 한 번 중요한 영향을 받는다. 애자일이라는 이름이었다. 다음 시절 곁눈질로 익힌 XP라는 개발 문화가, 알고 보니 애자일의 다른 이름이었다. 컨설턴트 김창준을 중심으로 한 애자일 모임 엑스퍼에 드나들며, 그는 자신이 어깨너머로 배운 테스트 주도 개발과 짝 프로그래밍과 코드 공동 소유의 이론적 배경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을 넘어, 건축가의 사유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지혜까지. 한 번은 그 자리에서 애자일의 아버지라 불리는 켄트 벡을 만나는 영광도 누렸다. 그리고 김창준이 주도한 2006년 NHN 개발자 컨퍼런스의 기획에 곁다리로 참여했는데, 그것이 네이버의 대표 개발자 행사 데뷰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 컨퍼런스에서 그는 웹서비스와 에이잭스를 주제로 발표했고, 다소 부끄러운 결론을 내렸음에도 그날 가장 많은 청중이 든 세션이었다고 한다. 바닥에서 시작한 사람이, 어느새 무대 위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큰물에는 큰 실패도 있다.
부동산 서비스를 새 프레임워크로 전면 개편하는 프로젝트가 그에게 맡겨졌다. 그가 강하게 밀어붙인 PHP 젠드 프레임워크가 쓰였고, 그가 개발을 지휘했다. 학습 기간 탓에 초기에는 더뎠지만, 좋은 개발 관행을 하나씩 세워가며 셋이서 고군분투해 마침내 오픈을 앞두었다. 이 개편의 핵심은 네이버가 부동산 매물을 직접 등록받는 것, 곧 직접 매출이 발생한다는 데 있었다. 영업도 활발히 진행되었고, 기대는 컸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서비스를 개시하자마자 먹통이 되었다. 진행되던 부동산 업체들과의 계약은 파기되거나 조정되었고, 회사에 수십억 원 단위의 손해를 끼쳤다.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매물을 상위에 노출시키려는 업자들이 초 단위로 매물을 갱신했고, 그 폭증하는 쓰기 요청을 감당하기 위해 그는 당시 야후가 성공적으로 썼다는 마이에스큐엘 링 토폴로지 구조를 짰다. 그런데 서버 구성을 맡은 외주사 IBM의 시스템 엔지니어가 로드 밸런서 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 사달이 났다. 개발을 책임지던 그가 시스템 영역을 미처 챙기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그는 시말서를 썼다. 그러나 책임은 시말서로 끝나지 않았다. 여러 경로로 그가 모든 것을 떠안으라는 압박이 가해졌고, 사고와 직접 관련도 없던 젠드 프레임워크까지 도매금으로 매도되었다. 네이버가 자바 기반 프레임워크로 돌아선 데에는 이 일의 그림자가 있었을 것이다. 거대한 조직은 실패의 원인을 정밀하게 가려내기보다, 책임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데 익숙했다. 수습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내부 채용 공고를 통해 가까스로 다른 팀으로 옮겼다. 조금만 늦었다면 회사를 떠나야 했을 수 있다. 그는 지금도, 남아서 뒷수습을 했던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
그의 인생이 늘 0점에서 합격으로 향하는 반전의 연속만은 아니었다. 그도 무너졌고, 떠밀렸고, 책임을 뒤집어썼다. 다만 이번에도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 대신, 다음 문 하나를 찾아 몸을 옮겼을 뿐이다.
새로 옮긴 곳은 검색본부 산하의 통합검색 관련 팀이었다.
검색본부는 분당 서현동의 퍼스트타워에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그때 살던 수내동 오피스텔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분당구청을 가로질러 가면 곧 회사였다. 또 한 번의 짧은 출퇴근.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그가 운을 끌어당기는 사람이라 해야 할지.
검색은 네이버의 본진이었다. 매출의 심장이었고, 그래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우가 좋았다. 업무 강도는 이전 팀과 비교할 수 없이 낮았는데, 성과는 오히려 잘 나왔다. 그의 하루는 이랬다. 아침 식사가 끊기는 10시 직전에 가까스로 출근해, 11시쯤까지 할 일을 하고, 회의가 없으면 집으로 건너가 동거 중이던 여자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영화를 보거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함께 인터넷을 하거나, 데이트를 즐기다 4시쯤 사무실로 돌아와 마무리하고 6시에 칼같이 퇴근했다. 그 여자친구가, 이제 그의 곁에 오래 머물게 된 김정은이었다. 가장 평화로운 그 시절의 점심 식탁에, 그녀가 있었다.
어느 회식 자리에서 동갑내기 한 동료가 그에게 부러움을 표했다. 강 과장처럼 실력 있는 개발자가 되어 고속 승진하고 인정받고 싶다고. 그는 어리둥절했다. 다음에서처럼 강한 목표 의식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돌아보니, 그는 조금 앞에 와 있었다. 인물 참여 검색이라는 프로젝트에서는 위키의 개념을 빌려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었고, 전사 표준이 자바로 바뀌었을 때도 다음 시절 손에 익은 기술 덕에 남들보다 앞서 나갔다. 여유로운 일정이었음에도 그 서비스의 성과급은 사상 최대였다. 연봉을 훌쩍 웃돌 정도였다. 서울대나 카이스트가 아니면 대우받지 못한다던 첫날의 충고는, 그렇게 조용히 반증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그를 갉아먹는 것이 있었다. 차세대 통합검색 관리도구 프로젝트에서 그는 파트장을 맡게 되었는데, 그 자리는 개발자라기보다 관리자에 가까웠다. 그는 관리자의 길에 관심도 자질도 없다고 느꼈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파트원들 사이에서 매일 고민이 깊었다. 한 회식에서는 그 점을 두고 직설적인 불평을 듣기도 했다. 일은 편안했고, 보상은 두둑했고, 출퇴근은 5분이었다. 그런데 그 안온함 속에서, 그의 마음 한구석은 천천히 메말라 가고 있었다. 도전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어디론가 흘러가다 고여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을 것이다. 이끼 낀 다라이의 물처럼.
그 무렵, 그는 우연히 한 영상을 보게 된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졸업식에서 한 축사였다. 사랑하는 일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안주하지 말고 계속 찾으라는 그 말이, 안온함 속에서 메말라 가던 그의 가슴을 정확히 찔렀다. 계속 찾으라, 안주하지 말라. Keep looking, don’t settle. 그날 이후 그 문장은, 그가 평생 품고 사는 말이 되었다. 고이려는 물을 자꾸만 다시 흐르게 하는 한마디. 축사의 마지막에 잡스가 남긴 말,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는 그 말까지도, 그의 어딘가에 함께 새겨졌다.
가장 큰 물은, 그렇게 그를 안전하게 품어주는 동시에 서서히 지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어렴풋이 한국 밖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떨까. 더 깊은 물은 없을까.
그리고 바로 그 무렵, 2008년 봄의 어느 날, 사무실 문을 열고 경찰이 들이닥친다. 일과 결혼 준비로 한창 바쁘던 그 봄에, 그의 인생에서 가장 부당하고 가장 외로운 한 계절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