킥스아이에서 쌓은 성과가 다음 문을 열었을 때, 그 문 앞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안상희였다.
안상희는 컨테이전트 시절 인턴으로 만난 사람이었다. 명문 스탠퍼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회사에 몇 안 되는 한국인이었다. 타국에서 만난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그녀는 삼성 리서치 아메리카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 클라우드 연구소의 담당자이던 이주한 상무에게 태훈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도 그를 다음 자리로 데려간 것은 채용 공고가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
처음에 태훈은 삼성이라는 이름 앞에서 망설였다. 그는 이미 작은 실리콘밸리 회사들의 빠른 문화에 길들어 있었다. 한국 회사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한국을 떠나 태평양을 건너온 사람이, 다시 한국 회사로 들어가는 것이 어딘가 거꾸로 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안상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태훈 씨, 삼성에 관심 있으세요. 솔직히 처음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을수록 흥미가 생겼다. 클라우드 연구소는 스무 명 남짓한 연구 조직이었다. 본래는 순수 연구에 가까웠는데, 이제 그 연구 성과를 진짜 제품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딥러닝 기반 객체 인식과 고급 머신러닝 알고리즘이 있었지만, 그것을 삼성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실제 서비스로 바꾸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논문이 곧 제품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 가지가 의아했다. 왜 나일까. 그는 박사가 아니었다. 연구자도 아니었다. 스탠퍼드도, 엠아이티도, 카네기멜런도 아니었다. 부산 전자공고를 나오고 동명정보대학교를 졸업한 개발자. 연구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한참 뒤에야 그는 알았다. 그들이 찾던 것은 연구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연구를 현실로 옮길 수 있는 엔지니어, 서비스를 만들어 본 사람, 실제 사용자를 상대해 본 사람, 운영 환경에서 시스템을 굴려 본 사람을 그들은 찾고 있었다. 연구를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서, 제품을 만들 줄 아는 그는 오히려 보기 드문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주한 상무와의 만남은 마운틴뷰의 한 중식당에서 이루어졌다.
알고리즘 문제도 없었고, 화이트보드도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킥스아이에서 무엇을 했는지, 왜 데이터가 중요한지,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지. 0점짜리 시험지를 내밀던 다음의 면접도, 연결 리스트를 뒤집어 보라던 오픈마루의 면접도 아니었다. 밥상을 사이에 둔 대화. 그가 평생 가장 잘해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시험지 위에서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던 사람이, 정작 문제와 사람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때는 누구보다 분명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그는 제안을 받았다. 연봉은 거의 두 배였다. 그러나 결정이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마음을 정하게 한 것은, 또 한 번 사람이었다. 애런도 같은 제안을 받은 상태였다. 컨테이전트와 킥스아이를 함께 건너온 그 비자 동료, 낯선 땅에서 같은 불안을 나눈 친구. 애런은 더 큰 물에서 놀고 싶어 했다. 더 큰 조직, 더 큰 문제, 더 큰 영향력.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나는 갈 것 같아. 그 한마디가 태훈에게 크게 다가왔다. 솔직히 그는 애런에게 많이 기대고 있었다. 컨테이전트에서도, 킥스아이에서도 그랬다. 곁눈질로 하둡과 하이브를 가르쳐준 사람, 그를 데이터의 세계로 끌어들인 사람이 애런이었다. 애런 없이 혼자 설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솔직히 있었다. 결국 그도 합류하기로 했다. 혼자가 아니라, 애런과, 그리고 임창하와 함께였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한 사람의 주변에, 그렇게 같은 배를 탄 얼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삼성 리서치 아메리카에 출근한 첫날,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거쳐온 어떤 회사와도 다른 공기 속에 서 있었다.
숨피는 정직원이 넷이었다. 컨테이전트는 스무 명 남짓의 스타트업에서 시작했고, 킥스아이는 빠르게 자라는 게임 회사였다. 그런데 이곳은 연구소였다. 복도를 걸으면 벽에 연구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회의실에서는 논문과 새 기술 이야기가 오갔다. 사람을 소개받을 때마다 박사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들렸다. 스탠퍼드, 버클리, 엠아이티, 카네기멜런. 이름만 들어보던 학교 출신 박사들이 옆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클라우드 리서치 랩의 소장은 실리콘밸리에서 전설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제록스 파크 출신. 그래픽 인터페이스와 이더넷과 레이저 프린터가 태어난, 미래가 먼저 만들어지는 곳이라 불리던 그 연구소의 문화를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회의실의 언어부터 달랐다. 스타트업에서는 늘 언제 만들 수 있느냐를 물었다. 이곳에서는 왜 이 방식이 최선인가부터 물었다. 만들기 전에 연구했다. 왜 그 문제가 생기는지, 기존 연구는 무엇인지,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그들은 문제를 구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문제를 증명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훈은 이 빛나는 조직의 가장 깊은 고민을 이해했다. 연구 성과는 많았다. 정말 많았다. 마침 딥러닝이 세상을 막 바꾸기 시작하던 무렵이었고, 객체 인식과 영상 분석과 음성 처리에서 훌륭한 결과들이 쏟아졌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TV는 논문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논문에서 성공한 기술이, 곧바로 삼성 TV나 스마트폰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객체 인식 알고리즘 하나를 예로 들면, 연구실의 컴퓨터에서는 잘 돌아갔다. 그런데 삼성의 규모에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수천만 대의 TV, 수억 대의 스마트폰. 그 영상 데이터를 분석하려면 먼저 데이터를 어딘가로 보내야 하는데, 영상 덩어리 자체가 너무 커서 전송만으로도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연구실에서는 사소했던 문제가, 현실에서는 가장 큰 벽이 되었다. 우아한 알고리즘이 거대한 규모 앞에서 무력해지는 그 지점. 바로 거기에, 이론의 사람이 아니라 작동의 사람이 필요했다.
애런과 태훈은 곧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데이터를 움직이지 말자. 대신 계산을 데이터가 있는 곳으로 보내자. 그래서 그가 연구소에서 처음 맡은 일은, 뜻밖에도 머신러닝 모델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천 대가 넘는 데이터 노드를 가진 하둡 클러스터를, 자체 데이터센터에 직접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 시절의 클라우드로는 그들이 원하는 수준의 데이터 지역성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서버와 랙과 네트워크 장비. 부산 전산실에서 홈페이지를 만들던 시절의 그로서는 상상조차 못 했을 규모였다. 그리고 그 위에 블롭 스토어와 키밸류 스토어를 얹었다. 목표는 단순했다. 데이터를 옮기지 않는 것. 데이터가 있는 자리에서 곧바로 계산이 일어나게 하는 것.
데이터를 옮기지 말고 계산을 데이터로 보낸다. 평생 그는 자신을 멀리로 옮겨 무언가가 되려 한 것이 아니라, 있는 자리에 오래 머물며 거기서 길을 낸 사람이었다. 그 오랜 방식이, 이번에는 거대한 분산 시스템의 설계 원리가 되어 있었다. 그 플랫폼 위로 드롭박스를 닮은 컨슈머 클라우드가, 헬스케어 서비스가, TV 광고 개인화를 위한 사용자 이력 분석 시스템이 하나씩 올라왔다. 연구 조직은 어느새 제품 조직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그 시기는 즐거웠다. 그는 조직 안에서 한국인 리드 역할도 맡았고, 한국 본사와의 협업 때문에 출장이 잦았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다가 한국으로 출장을 가고, 서울에서 회의를 하고, 틈틈이 친구와 가족을 만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 돌아오는 삶. 예전의 그는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부산을 택하면 서울을 잃고, 한국을 떠나면 미국에 갇히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 무렵 그는 처음으로, 두 세계를 모두 가진 듯한 감각을 느꼈다. 떠나온 곳과 도착한 곳, 모국어의 땅과 새 언어의 땅,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어느 쪽도 잃지 않는 사람. 곧 돌아갈 줄 알고 한쪽 발을 한국에 두었던 그가, 이제는 그 두 발을 양쪽 대륙에 걸친 채 자유로이 오가고 있었다.
그 경험은 더 큰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국과 실리콘밸리는 정말 다른가.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며 일하는 사람은, 대체 어디에 속하는가. 그 물음은 오래도록 그를 따라다니다가, 먼 그가 다시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돌아가는 선택의 밑바닥에 깔리게 된다.
삼성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는 집도 옮겼다.
산호세의 연구소로 매일 출근하기에 베이 건너 헤이워드의 타운하우스는 멀었다. 그래서 그는 밀피타스에 브룩필드가 지은 벨코트라는 더 크고 새것인 집을 지어 이사했다. 산호세로 출퇴근하기 한결 가까운 곳이었다. 한국에서 빼 온 전세금에 조금 보태 처음으로 가졌던 그 대궐 같던 집이, 이제는 더 큰 집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다. 평생 떠밀려 다니던 이사가, 처음으로 더 나은 곳을 향해 스스로 택하는 이사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헤이워드의 그 집이 낯선 손에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그 집은 임창하에게 건너갔다. 청주 한벌국민학교 동문이자 아내들끼리 동갑이던 오랜 벗. 하와이의 한 게임 회사에서 레이오프된 그에게 태훈이 먼저 손을 내밀어, 둘은 킥스아이에서 한솥밥을 먹고 두 가족이 함께 캠핑을 다닐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종이상자를 안고 바트에 오르며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누구보다 잘 알던 그였기에, 집을 넘기는 데 가격표를 따지지 않았다. 그저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멀리서 흘러온 벗의 안착지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가 미국에서 처음 마련했던 집은, 그렇게 사람에서 사람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임창하는 그를 따라 삼성 리서치 아메리카로 합류했다. 태훈이 비운 블리자드의 자리에 스승 정원희가 들어왔듯이, 태훈이 먼저 닦아둔 삼성의 길로 오랜 벗이 따라 들어온 것이다. 신승철은 베이에어리어의 이웃으로 와 있었고, 애런은 같은 연구소에서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낯선 땅에서 진짜 외국인이 된 기분으로 시작한 미국 생활의 주변에, 그렇게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가방을 풀어도 좋을 이유가 늘어가고 있었다.
다만 연구소의 깊고 조용한 물 속에서, 그의 어딘가는 다시 더 빠른 물살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실리콘밸리는 그를 또 다른 무대로 불러낸다. 사람들의 별점과 리뷰가 데이터가 되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