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전트는 그가 처음 들어갔을 때 스무 명 남짓한 회사였다.
대표 제프도 매일 볼 수 있었고, 엔지니어링 부문의 책임자도 개발자들과 바짝 붙어 일했다. 페이스북 게임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절이었고, 컨테이전트는 게임 회사들이 사용자 행동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플랫폼을 만들고 있었다. 게임 업계용 구글 애널리틱스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훨씬 복잡했다. 게임 안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이벤트를 모으고, 분석하고, 사용자가 왜 머물고 왜 결제하고 왜 떠나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숨피에서는 영어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료들이 교포였고, 한국어가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으니까. 그러나 컨테이전트는 달랐다. 회의도 영어, 점심시간의 농담도 영어, 이메일도 영어였다. 그는 처음으로 진짜 외국인이 된 기분을 맛보았다. 농담의 맥락을 놓쳐 웃을 타이밍을 놓치고, 빠른 대화의 가장자리에서 반 박자 늦게 따라가는 사람. 한국에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하는 데 익숙했던 그가, 이곳에서는 언어라는 또 다른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그 무렵 가까워진 사람이 애런 선이었다. 애런 역시 비자로 미국에서 일하던 중국에서 온 외국인 엔지니어였다. 같은 직급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고, 회사에 몇 안 되는 비자 소지자였다. 비슷한 처지가 둘을 빠르게 가깝게 만들었다. 낯선 땅에서 같은 종류의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다.
애런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데이터 마이닝 전문가였다. 데이터 파이프라인과 하이브 기반 분석을 담당했고, 작은 회사답게 이것저것 다 했다.
태훈은 처음에는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웹 애플리케이션 같은 주변 업무를 주로 맡았다. 그런데 애런이 그의 자바 경험을 알아보고, 하둡과 하이브 프로젝트에 끼워주었다. 태훈은 그때도 자신을 데이터 엔지니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애런을 도와주는 사람 정도로 여겼다. 평생 그래왔듯이, 잘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기에, 곁눈질로 배우며 한 발씩 들어갔다.
그는 그때 그것을 거창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애런의 어깨너머에서 하둡과 하이브를 익혔고, 그 기술은 조용히 그의 다음 문을 열기 시작했다.
회사는 빠르게 커졌다. 스무 명 남짓하던 조직이 채 2년이 되지 않아 이백 명이 넘었다. 어느 날 출근하면 모르는 얼굴이 생겼고, 몇 달 뒤면 조직도가 바뀌었다. 그의 첫 6자리 연봉도 이 회사에서 받았다.
그리고 그는 집을 샀다.
샌프란시스코의 월세는 부담이 컸다. 매달 2천 달러가 넘는 돈이 그저 사라졌다. 그러던 중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빼 온 전세금에 조금만 보태면, 이곳 베이 건너편에는 집을 살 수 있었다. 그것은 묘한 일이었다. 판교에 내 집을 갖고 싶어 청약을 넣었다가 떨어진 그가, 그 좌절의 전세금을 들고 태평양을 건너와, 마침내 집의 주인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 갖지 못한 집의 보증금이, 미국에서 가질 집의 계약금이 되었다. 가지 못한 길의 노잣돈이, 다른 길의 입장료가 되어준 셈이다.
그가 산 집은 헤이워드의 신축 타운하우스였다. 전용 차고가 딸린 3층짜리 집. 방이 셋, 화장실이 셋. 전철로 삼십 분 거리였다. 그에게 그 집은 대궐 같았다.
남의 마당을 가로질러야 화장실에 갈 수 있던 셋방의 소년. 화장실 하나를 쓰러 주인집 식구들의 눈을 지나야 했던 아이. 받아둔 물에 이끼가 끼던 다라이로 세수하던 아이. 그 아이가, 화장실이 셋이나 되는 집의 주인이 되었다. 자기 집이면서 자기 집이 아니던 남의 마당을 평생 잊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 자기만의 차고와 자기만의 세 층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곧 돌아갈 줄 알았던 사람이, 집을 샀다. 그것은 마음의 한쪽 발이 슬며시 이 땅에 닻을 내리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는 닥스훈트 강아지 멍실이를 입양했다. 골든게이트 파크에서 열린 회사 야유회에 멍실이를 데려갔을 때, 그는 처음으로 미국 생활이 정말 안정되어 간다고 느꼈다. 가방을 다 풀지 않았던 사람이, 이제 강아지를 들이고 집을 들이며, 한 칸씩 가방을 풀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월요일 아침, 그는 해고당했다.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부터 공기가 이상했다. 몇몇 사람들이 회의실로 불려 들어갔다. 곧 그의 차례가 왔다. 설명은 짧았다. 회사가 구조조정을 한다는 것, 오늘이 마지막 근무일이라는 것. 에이치원비 비자로 미국에 머물던 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한국에서 회사를 옮길 때는 대체로 그가 선택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회사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종이상자 하나를 받았다. 책상 위의 머그컵, 노트, 충전기, 책 몇 권, 작은 메모들을 담았다. 짐은 많지 않았다. 몇 년을 다닌 회사인데, 상자 하나면 끝이었다. 보안카드를 반납하고 건물을 나와 몽고메리 역으로 내려갔다. 출근 시간이 아니어서 바트는 한산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상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헤이워드로 가는 익숙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비자는 어떻게 되지. 아내에게 뭐라고 말하지. 당장 공과금은. 미국에 남을 수는 있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질문은 몰려왔지만 답은 없었다. 열차가 베이를 건너는 동안, 눈물이 흘렀다. 크게 운 것은 아니었다.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그냥 조용히 흘렀다. 무릎 위의 종이상자를 붙잡고 창밖을 보면서. 아침에는 회사원이었고, 낮에는 실업자였다. 곧 돌아갈 줄 알았던 그 마음이, 이번에는 정말 등을 떠미는 듯했다. 대궐 같은 집을 사고 강아지를 들이며 겨우 풀기 시작한 가방을, 다시 싸야 한다는 두려움. 이제 막 닻을 내리려던 자리에서, 그는 다시 표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메일이 오고, 링크드인 메시지가 쏟아졌다. 괜찮아? 이력서 보내. 우리 회사 사람 소개해 줄게.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해고당한 사람이었다. 버려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실패자로 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회사가 어려워진 것과 엔지니어 한 사람의 가치가 사라진 것을, 전혀 다른 일로 보았다. 회사가 그를 내쳤다고 해서, 그의 실력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 차이가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한국에서 회사가 무너지거나 그를 뱉어낼 때, 그것은 곧 그의 가치가 부정당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네이버에서 그를 보안요원에게 쫓겨나게 했을 때, 그는 죄인도 실패자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다뤄졌다. 그런데 이 낯선 땅에서는, 한 회사의 사정과 한 사람의 값어치가 분리되어 있었다. 그 분리가, 떠밀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한 통의 전화가 천장만 바라보던 그를 일으켰던 2000년처럼, 이번에는 수많은 전화와 메시지가 종이상자를 든 그를 일으켰다.
그 연결의 한가운데에 애런이 있었다. 그리고 킥스아이가 있었다. 곁눈질로 배운 하둡과 하이브가, 그리고 낯선 땅에서 같은 불안을 나눈 한 친구가, 그를 다음 항구로 데려갈 참이었다. 종이상자 하나로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는, 사실 가장 중요한 장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