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낯선 신입이 아니었다.
칼 퀸의 빈자리를 메우며 한 번 증명해 보인 사람으로, 그는 옛 동료들의 환대 속에 돌아왔다. 떠날 때 한마디로 충분했듯, 돌아오는 길도 한마디로 충분했다. 다만 그가 돌아온 죽스는, 그가 떠날 때의 죽스가 아니었다. 아마존에 인수된 뒤 조직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있었다. 사람도, 예산도, 기대도 모두 부풀어 있었다. 한때 투자금이 바닥나 마일스톤에 목을 매던 작은 회사가, 이제 세계 최대 기업의 든든한 자회사가 되어 있었다. 이전에 고성과를 낸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면서도, 동시에 묵직한 부담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다시 한 번 무언가를 해내리라 기대했으니까.
집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가방을 메고 교문으로 들어서는 작은 뒷모습. 낯선 흙에 떨어진 한 포기 미나리가, 이제 제 또래들 사이에서 자라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두 번째 죽스의 문으로 들어서던 무렵, 딸은 미국 학교의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각자의 새 세계로 첫발을 떼고 있었다.
거대해진 조직 한복판에 다시 선 그는, 문득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십수 년을 헤엄쳐온 이 물은, 대체 어떤 물이었던가.
다음과 네이버에서 시작해, 컨테이전트와 킥스아이와 삼성과 옐프와 우버와 죽스와 엠바크를 거쳐온 긴 항해. 한국에서 십 년, 미국에서 다시 십 년 가까이. 그는 두 세계의 물을 모두 깊이 헤엄쳐본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두 물은, 같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곳인데도 근본부터 달랐다. 그가 미국에서 그토록 오래 머무는 이유도, 결국 그 차이 때문이었다. 잠시 항해를 멈추고, 그는 자신이 헤엄쳐온 실리콘밸리라는 물의 정체를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가장 먼저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개발자라는 말의 뜻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권한은 기획자에게 있었고, 개발자는 기획자가 잡아 놓은 모양을 코드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실리콘밸리에는 기획자라 할 만한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개발자는 문제를 코드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 찾아내 끝까지 풀어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엔지니어는 세상의 변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사회적 지위도 보상도 그만큼 달랐다.
그 차이는 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그는 훌륭한 개발자인 동시에 훌륭한 직장인이어야 했고, 일의 목적이 본질적인 문제 해결보다 상사에게 잘 보이는 데 기울 때가 많았다. 이곳에서는 평가의 상당 부분이 동료 평가였다. 매니저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매주 일대일로 마주 앉아 불편한 건 없냐, 뭘 도와줄까를 묻는 조력자였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일이 거의 없는 그 환경이, 그를 이 물에 오래 머물게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또 하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자유였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고, 휴가도 사실상 무제한이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묻는다. 그렇게 풀어놓으면 업무 강도가 없지 않냐고. 그러나 그가 한국에서의 경험과 비교해 본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 자유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썼다. 적은 시간을 밀도 있게 활용해, 6개월이나 1년을 두고 보면 그 결과물이 시간을 길게 붙들고 있던 시절보다 훨씬 나았다. 회사는 정말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다. 다른 고생 없이, 정말 풀어야 할 문제에만 몰두하는 것. 그 환경이 결국 실리콘밸리가 쏟아내는 수많은 변화의 바탕이었다.
그러나 그가 실리콘밸리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은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다양성이었다. 한국이라면 모바일 앱에 로그인 버튼 하나 넣자 하면 끝날 일을 두고, 이곳에서는 로그인이란 무엇인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를 끝없이 논쟁했다. 처음에 그는 그것이 지독히 비효율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다른 시각으로 다시 문제 삼아야, 비로소 보이지 않던 문제가 보이고 거기서 혁신이 태어난다는 것을. 저마다 다른 물을 헤엄쳐온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부딪치는 것, 그 부딪침이 곧 동력이었다.
그 깨달음은 그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공고를 나오고 F학점을 수두룩하게 받은 흙수저 개발자, 한국의 잣대로는 늘 기준 미달이던 그가, 이곳에서는 남들과 다른 시각을 가진 한 조각의 다양성으로 환영받았다. 객관적 기준점을 넘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개성이 회사가 찾는 사람과 얼마나 들어맞느냐를 보는 잣대 위에서, 그의 별난 이력은 결격이 아니라 개성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분명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영어였다.
영어는 생각보다 그렇게 큰 장벽이 아니었다. 블리자드 시절, 검토도 안 거친 엉망의 영어로 본사에 메일을 보내도 그들이 용케 알아듣던 그 경험에서 이미 작은 확신이 싹텄었다. 전달할 생각이 있고 풀어야 할 문제가 있으면, 대화는 이루어졌다. 그 자신이 인재를 뽑는 자리에 앉아 보니 더욱 그랬다. 그는 지원자가 영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에 가려 그 사람의 진짜 실력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면접관이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빛이 없다며 그를 돌려보낸 그 옛날의 면접관과, 그는 정반대의 면접관이 되어 있었다. 언어의 서툶 너머에 있는 한 사람의 실력과 가능성을 보려는 사람으로.
그렇게 그는 자신이 헤엄쳐온 물의 정체를 헤아렸다. 그리고 그 헤아림의 끝에서, 한 가지 사실이 더욱 또렷해졌다.
그가 미국에 이토록 오래 머무는 이유는, 한국에서의 개발자의 삶과 이곳에서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삶이 너무도 극명하게 갈리고, 그 갈린 모습이 그에게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바로 그 깨달음의 한복판에서 그는 또다시 한국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좋은 물을, 이 좋은 일하는 방식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그곳에도 옮겨 심을 수 있다면. 두 물을 다 헤엄쳐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그 욕심이, 그의 안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한 번의 귀향이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도,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더 깊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불을 댕긴 것은, 다름 아닌 일린이였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아이의 한국어가 조금씩 서툴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평생 좇아온 것은 풀고 싶은 문제였지만, 이번만은 문제가 아니라 한 아이의 모국어가 그의 항로를 틀고 있었다.
거대해진 죽스에서 그는 또 한 번 좋은 성과를 냈다. 전사적인 분산 트레이싱을 이끌었고, 시뮬레이션 파이프라인의 성능과 비용을 한눈에 보는 체계를 다졌다. 그러나 그 단단한 성과의 이면에서, 그의 시선은 점점 더 자주 태평양 건너를 향했다. 머지않아, 그가 지난 십여 년간 해온 모든 일이 한곳에 모인 듯한 기회가, 바로 그 그리운 나라에서 그를 부르게 된다.